무탄초난(毋憚初難) 2. ‘언어’가 다르다!

담담당당, 2009/11/20

20세기 알려진 언어학자 중에서는 아마 소쉬르와 노움 촘스키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듯하다. ‘랑그, 빠롤’이란 개념을 꺼낸 소쉬르의 언어이론에서 ‘랑그’는 한 언어가 가진 추상적 체계이며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약속으로 설명된다. 체계이기에 그것은 유한하다. 그에 비해 ‘빠롤’은 개인적 발화행위이며 체계의 구체적 실현이다. 당연히 개인적 발화이기에 무한하다고 정의된다. 소쉬르의 랑그, 빠롤의 구분은 이후 진행된 모든 구조주의 이론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시나 소설 혹은 신화나 경제 행위 등을 언어구조주의로 연구할 때 거기서 모종의 규칙체계, 즉 문법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의미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진전된다.

고종석의 언어카페에 최근(11.1) 올라온 글 가운데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는 대목을 설명한 부분이 자세히 있다. 촘스키에 관한 대목도 있다. 이 두 설명은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아주 직결되기에 그 중 일부를 그대로 옮겨온다.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중략)

흔히 촘스키 언어학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변형생성문법이란 뭘까요? 그리고 그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감격스럽게도 제게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오셨어요.
  2. 존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게도 선생님께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왔어요.

촘스키는 이런 [두 문장의 동일한] 표면구조 '저 아래에 누워있는(underlie)' 또 하나의 구조를 가정합니다. 촘스키가 심층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르는 이 층위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심층구조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은 '선생님을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목적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문장)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제자들'은 심층구조에서 '제자들이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주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입니다. 즉 심층구조에서 '선생님'은 '존경하다'의 목적어인 데 비해, '제자들'은 '존경하다'의 주어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심층구조는 의미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서로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이 동일한 표면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은, [NP 목적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과 [NP 주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을 [V-는 NP]라는 동일한 NP(명사구)로 유도하는 규칙이 한국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를 유도하는 과정을 '변형'이라 하고, 그 변형에 쓰인 규칙을 변형규칙이라 합니다. 촘스키 문법을 변형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변형규칙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생성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한한 규칙들의 집합(구조)을 통해서 무한한 적격(well-formed) 문장들을 생성해내는 모국어 화자의 능력에 이 이론이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언어’에 관한 나의 의견을 꺼내본다. 어떤 언어학자들도 모두 지적하는 부분에서 ‘언어’가 가진 ‘기호표현과 기호내용’을 떠나서 설명될 수 있는 ‘표현과 가치’란 존재하기 어렵다. 즉,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속에서 하나의 체계, 가치체계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있어 언어-내가 정의하는 것이므로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아래의 네 가지가 늘 복합되어 움직인다.

첫째, 말이다. 이것은 ‘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이것이 꼭 ‘글’이나 다른 언어 양식들과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기에 직접 대면(對面)이란 형태를 가지게 된다. 즉, 사람 대 사람이라는 관점이 부여되는 것이다.

둘째, 글이다.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 간에 ‘글’은 ‘글’이다. 그 속에서 체계, 문법을 가지게 되어 있다. 한글로 표현되거나 혹은 다른 언어라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어떤 심층구조가 형성되건 내면이 표현되건 간에 여하튼 ‘글’은 언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셋째, 행동이다. 이것을 언어로 정의하는 것은 행동 자체가 사람이 가진 신체언어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 또 그를 통해 정확하게 상대를 읽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사회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역사를 감안하기 때문이다.

넷째, 침묵이다. 혹자는 왜 침묵마저도 언어라고 하는가 말하지만 내게 있어 누군가의 침묵, 혹은 어떤 대상의 침묵은 여러 언어로 작동된다는 경험들이 많았고 해서 이를 하나의 언어영역에 포함시켜서 보는 습관이 있다.

이를 통해 작년 이진법에서 진행된 ‘미네르바’라는 필명의 ‘글’의 언어가 ‘말이나 행동’으로는 표현되어 나오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어떤 언어를 내고 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단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입체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보지 않고 그 글과 침묵,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과 행동’을 짐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도 이른바 ‘박대성’ 판의 이 미네르바 쇼 판이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변형된 판이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박대성’이란 ‘미네르바’를 자처하는 이의 언어는 미네르바의 그것과 전혀 동일하지 않다. 아니, 너무 달라서 쉽게 구분이 될 수 있을 정도다. 지난 5월 이후 6개월 정도라면 이제 이진법에서 바로 이진법의 언어로 그것을 해명해줄 수도 있을 정도로 연습을 거쳤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그리 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그가 보이는 ‘행위 언어’는 철저히 십진법 적이고 또한 그에 맞게 행동한다. 정작 보여야 하는 이진법에서의 언어는 전혀 보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습지 않는가? 그 익숙함은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그러므로 ‘그’는 아니다. 여기서부터 출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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