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1/23
우스갯소리로 정권이 국민을 보건 전문가, 금융 외환 전문가, 법률 전문가, 환경 수리(水利) 전문가, 미디어 홍보, 언론전문가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이 그렇다.
전문성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깊이 이해하고 알며 알려고 하는 것으로 출발하니까. 대체로 기득권적 전문성이란 것은 정계 관계 학계 사회단체 등으로 이어지는 일정한 삼연(三緣, 혈연 지연 학연)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들끼리 서로 전문성을 주고 받는다. 그 중에서도 몇몇 특정한 학맥이나 혹은 정권에 따른 지연의 인맥구도, 그리고 혼인 등으로 맺어진 복잡한 혈연구도도 있다. 고급의 정보는 그들끼리 서로 나눠서 보고 그리고 조용히 폐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돈 되는 정보 나눠 갖기 라는 것도 그런 부류의 하나다. ‘경제력=기득권=정치 영향력’이란 공식 속에서는 그런 것이니까.
인터넷을 통해 형성된 이진법의 세계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정보 세계에 있어서 강력한 질서변화라는 요동(搖動)을 만들어내어 버렸다. 물론 그 가운데는 ‘정보’라는 관점이 여전히 취약하게 움직이지만 그래도 ‘각성’(覺醒)이란 단어에서는 다양한 전문가 혹은 그런 전문가를 구분하는 눈이 많아지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모든 게 정보라는 관점에서 출발되는 건 아니다. 이건 바로 ‘인지’(認知) 문제니까.
대략 하루에 신문이나 방송 뉴스가 만들어지는 것이 약 8,000~10,000건 수준이고 그 가운데서 1,000건 전후한 수준의 뉴스 정보들이 인터넷 포털 속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숫자보다 훨씬 많은 양의 댓글(덧글)이 움직이고 다시 뉴스와는 다른 형식의 정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아고라 같은 토론 사이트는 물론이고 블로그 등에서도 서로 공간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
문제는 ‘비판’이란 각도 속에 있는 정보영역이다.
지금까지 신문 방송 등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카르텔 영역처럼 취급되던 정치 사회 심지어 시대나 역사적 비판 기능 자체가 인터넷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작년 촛불 민심 이후 터진 일종의 비판의 ‘영역(領域) 반란’ 같은 것이었다. 다양한 비판 속에는 이성적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취급될 오작동된 정보 혹은 그런 반응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일부분이었고 그들이 오프라인(십진법)에서 하는 것에 비하면 비교할 바도 없는 미세한 것이었다. 그것을 교묘하게 끄집어 내어 하나로 묶는 ‘사악한’ 작업이 진행된 것은 카르텔의 자기보호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세밀히 보면 이건 밥그릇 싸움의 영역까지 번진 대목이다. 최소한 뉴스를 통한 비판은 자신들의 고유 영역이라고 하는 의지표현 같은 것 말이다. 자기 밥그릇에 맛을 더하는 게 아니라 재를 보탠다 생각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집단지성’이 아니라 이진법이 ‘찌질이’라는 이른바 ‘인터넷 사용자 찌질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들도 인터넷 활동들은 한다. 요즘은 남녀노소 세대를 가리지 않고 최소한 이진법 내의 자기 정체성을 나름 가지고 있는 편이니까. 그러나 이런 활동들이 집단화 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서 비판의 카르텔 속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 기득권의 완고한 보호본능에 가까운 입장도 드러나게 되었다.
그 계기가 ‘미네르바’ 필명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의 글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명확하게 날이 서 있는 ‘비판의 흐름’을 가진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권부(權府)와 정책, 보이지 않는 그들의 ‘대책’(對策)까지도 마구 파헤쳐 가면서 전개되었다.
무서운 칼부림이었다.
정권사모펀드’라는 개념이나 심지어 ‘정권ATM기기 만들기’까지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정치권력, 정치세력에게는 이런 형식 자체가 노출되는 것 수준 아닌 기정사실화하고 정보 전개를 하는 것 자체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의 모토처럼 사람들에게 각인(刻印)되고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까지 탐색되는 과정까지 거치게 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심각해진다. 어떤 일을 추진한다고 해도 그 ‘시선’(視線)은 남게 되어 있다. 굳이 내부고발자를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자가 많아진 은밀한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밀어붙이고 몰아붙여도, 사건은 터지게 되어 있다. 정보가 여기 저기 새어나가니까.
그래서 필사적인,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방어막이 가동된다.
‘법’은 그런 점에서는 십진법의 가장 유용한 정권, 정치세력, 세력의 활용도구다. 그 잣대 속에서는 일단 집어 넣고 무효화가 되더라도 밀어 넣는 그 자체가 공포로 받아들여지는 심리가 도사린다. 그걸 활용하는 것이다. 공포정치가 달리 공포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위협이나 협박이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정보’라는 관점에서 보자. 우리가 보는 것은 일단 ‘뉴스’다. 하루에 8,000~10,000개나 양산되는 뉴스 속에는 허위사실이 없는가? 아주 많다. 그걸 걸러내는 작업을 법이 하고 있는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인터넷의 일개 논객이 쓴 비판의 글이 허위사실이란 명목으로 법리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렇게 따지면 해답은 점점 좁혀진 공간 속에서 나오게 된다.
첫째, 이진법(인터넷 혹은 온라인)의 기능 자체를 축소화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바로 기득권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에서 ‘비판’을 주무기로 해서 비즈니스와 담합, 협상을 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치나 경제, 사회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그것을 이진법에 뺏길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이기도 했다.
둘째, 축소화될 대상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를 통해 형성되는 세력이다. 비판을 하나의 방향이나 각도로 모아가서 형성되는 세력을 말한다. 이것을 반정부적(반정권적)이라거나 혹은 반사회적으로 몰아간다. 그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사회 내부의 ‘갈등 구도’가 복잡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이런 부류 자체가 형성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욕이 더 강했다. 건전이 강조되고 악플이니 선플 논란이 대두되었다. 정상적인 문화 홍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십진법 사회는 이보다 더 극심하다는 걸 감안하면 교묘한 계몽적 접근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셋째, 그 대상이 필요했다. 비판을 비판으로 소화하지 않겠다고 이미 표현한 마당에 비판을 비난으로 만들고 비난을 허위사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 일차적인 대상은 역시 작년 한 해에서 ‘미네르바’ 필명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칼부림을 무디게 만들어야 하는 특별한 방어를 해야만 했다. 그것도 이진법에서. 이젠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 마구 난도질을 하는 이른바 난장(亂場)을 벌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미네르바’는 죽었다.
이진법을 보는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찌질이’가 날뛰는 모습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남게 되도록 조정했다. ‘몰이구도’라는 게 그런 거다. 딱 그들이 바라는 바였다. 지금도 그들은 그걸 아주 철저하게, 아니 처절히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긍정적인가? 한 사회로 보면 자기 팔을 스스로 잘라낸 꼴이다. 그들의 팔도 이진법 속에서 잘리기는 마찬가지니까. 이런 작업을 강화하면 할수록 십진법의 뉴스, 정보는 더 팔 다리가 썩게 되어 있다. 그들도 ‘찌질이’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미네르바’의 죽음은 이진법이 아니라 십진법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건 예언이 아니라 공식(formula) 같은 것이다. 아주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그것, 그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는지 여러 관찰하는 대상도 자연스럽게 생겨나 버렸다. 작용 반작용 법칙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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