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탄초난(毋憚初難) 5. 비망록과 박대성

담담당당, 2009/11/23

지금 우리에게 ‘박대성’이란 이름은 이제 ‘공적’ 이미지가 되었다. ‘공적’(公敵)이 아니라 ‘공적’(公的)이란 의미다. 그것은 이진법이 가진 ‘미네르바’라는 실체와 허상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유형의 개체다.

그래서 소쉬르가 말한 방식대로 차용해 본다. 이 자리에 500원이란 돈이 있고 그 물질적 표현이 ‘기호표현’이라면 교환할 수 있는 가치가 ‘기호내용’이라는 형식으로 들어가 보면 ‘박대성’과 ‘미네르바’를 일치시키는 표현과 교환가치 모두가 전혀 맞지 않는 현실의 기현상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

그가 미네르바인가? 아니다. 왜 그런가? 간단하다. ‘가치’를 증명하는데 실패했고 그에 덧붙여서 표현 자체를 잃어 버렸다. 무슨 표현? 이진법 아고라의 바로 ‘그것’이다. 흔적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증거로 남겨진 그의 글들이고 의식이다. 그에는 뚜렷한 흐름이 존재한다.

http://invisible.economist.free.fr/dm

저 속에 담긴 채 남아 있는 그의 글은 의식이고 흐름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징표다.

그로부터 출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허위’(虛僞)다. 당연히 그 내용물들에 있는 일정한 용어들, 혹은 사실들은 모두 이 기본자리를 차지한다. ‘정권사모펀드’, ‘여우사냥’ 같은 관념이 아닌 실재한 사건들처럼 그에는 반드시 그를 뒷받침 하는 해명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없다. 박대성은 지금까지 작년부터 이어진 그를 설명할 ‘기호표현과 기호내용’ 모두가 없다. 그러므로 성립되지 않는 등호(等號)를 가지고 백날 지껄여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낸 질문에 그가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놓는 논제는 아니다. 그가 해야 할 일에 관한 부분을 그는 회피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권리를 주장한다? 아주 우스운 일이다. 코미디 영역으로 다루어도 한참 가겠다 싶다.

내가 비망록을 작성하기 시작한 것은 2월이다. 그것은 동아일보가 진상조사위라는 약간은 짜놓고 치는 고스톱을 치듯 그렇게 하는 첫 낌새를 읽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5월까지 꾸준히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내게 남겨진 의문들을 모조리 담아두었다. 그 이후는 별로 챙겨 보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십진법 사건화를 주도한 기득권의 의도이기도 했는지는 모른다. 내게서 마저 관심을 끊게 할 정도로 사회의 몰지각한 상황인식에 염증이 생겼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일단 기록은 거기까지는 해두었다. 그리고 공개하려고 하던 차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부터 쭉 이어진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나도 바빴다.

사건을 간추려 보는 과정에 다른 이들이 이에 접근해서 내용을 파헤치는 일련의 작업들도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이 일의 내용은 뻔하다. 대전제 세 가지가 있기에 이를 피해갈 방법도 없다.

첫째, 이진법의 언어를 사용하던 정체성이 어느 순간 십진법에서 자신은 이진법의 과거 그 정체성을 모두 잊지만 그 내용물은 챙기겠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가짜 홍길동 판을 만들어서 주장한다? 그것이 허위의 첫 번째다.

둘째, 증명되어야만 하는 제기된 질의와 그 대상 문제들이 버젓이 남겨져 있다. 그의 ‘언어’는 그것을 채울 공간이 없이 엉뚱한 곳을 맴돌기만 한다. 그 사이 허위들은 더 늘어났다. 모두 깔아 뭉갠다. 뭘 믿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한다. 그걸 봐주고 있는 이 사회가 그토록 우습게 여겨지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은 그저 망각 속에서 이것을 다루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나마저 그런 마음이 불쑥 들 정도였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는 지나가게 되어 있다. 그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거나 아니면 어떤 이의 말처럼 조용히 떠나야 한다.

셋째, 막무가내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다면 ‘진짜’가 나오라는 식이다. 여기서는 상식이 통한다. 너 같으면 나오겠냐는 거다. 그래서 한 걸음씩 모든 사안들이 주는 ‘기호’를 해체하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의아하지도 않지만 무슨 저널리즘 운운 하는 이들의 거짓된 접근법은 뒤에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지만 당시 시점에서 누구 할 것 없이 모조리 사안에 대한 접근 자체를 꺼렸던 것은 앞으로도 한참 사회지식의 강한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다. 간단하다. 앞으로도 벌어질 일들은 그렇고 그렇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박대성’이란 인물 때문에 비망록을 쓴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사회가 이진법이라는 공간에서 십진법을 보고, 또 십진법이 이진법이란 공간을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관점으로 양분화된 것이 아닌 어떤 생산적인 방향으로 보기 위해서 지금 이 사건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는가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소위 언론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당사자들이 어떤 오류를 서슴없이 했던지, 그리고 어설프게 알고 있는 자들이 뭐라 했던지 구경한 것은 솔직히 고백하건대 약간의 즐거움이었다.

문제는 그 기록들이 그대로 다 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남겨져 있다 해도 찾아보지 않으면 꿰어지지 않은 구슬일 뿐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디 도망가지는 않는다. 왜 그랬나를 물어봐야 할 대상은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당사자가 도대체 몇 사람인지 구분조차 잘 안될 정도가 되었다. 그 혼잡함 속에 그냥 어떤 개개인들은 숨어있으려 하고, 그를 바탕으로 쇼 판은 벌어져 있는 셈이다.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이다.

아주 간단한 접근법이 이제는 필요할 때가 되어가는 듯하다.

비망록 제 I 편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미네르바 사건의 제 1 번 관점은 바로 ‘진위논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말할 주체가 없다. 당사자는 있다. 당사자로 등장한 바로 그 사람이 ‘박대성’이다. 그런데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더 많이 나왔다. 담당 변호인인지 혹은 보좌관이었다가 보좌역으로 명칭을 바꾼 자인지, 여하간에 여러 잡다한 말들이 이 일에서는 본인인 박대성이란 인물로부터가 아닌 엉뚱한 ‘회접’(廻接)을 보이니 정작 당사자는 인지(認知)를 제대로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부터 딱 헷갈리기 좋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진법의 필진(筆陣) 모두를 ‘찌질이’로 만들고자 하던 스스로 기득권이라 생각하던 어떤 언론 종사자들의 관념, 정의와 너무도 일치하는 모습이어서 더 경악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 이진법 글 쓰는 이들은 기자니 혹은 논설위원이니 편집국장이니 하는 이들의 글보다 한참 하수라는 말이다. 그리고 찾아보니 그냥 짜집기 편집광이고 그래서 그들은 찌질이로 인정한다는 그 컨셉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그 이후에 때 빼고 광 내고 한 부분은 있다.

나의 비망록 속에서 ‘박대성’이란 인물은 전혀 작년 이진법이 보여준 ‘언어’의 그 당사자가 아니다. 여러 이들이 내 팔목과 발목을 동시에 잡고 이 사건에 밀어 넣어준 덕분에 나는 그것을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그는 작년 내가 알고 있던 ‘미네르바’가 아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아마도 이진법에서 여론조사를 한다면 거의 90%는 넘을 것이고, 십진법에서 한다고 해도 거의 엇비슷한 수치를 보일 것이다. 이것이 민심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 또한 그와 그 부류들이 자초한 일이다. 원래부터가 잘못된 ‘판’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너무 많은 이들이 여기에 관련되게 된다. 일부는 비겁한 지식인으로 남고, 또 사회 모든 분야 부문에 있어서의 전문성은 위협 받는다. 이런 구분을 해낼 전문가는 없어졌다거나 혹은 알아도 말은 하지 않는 침묵하는 지식이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니까. 도덕적인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이건 사회 기제(機制) 자체에서 ‘지식적 판단’이란 아주 지독스러운 열병을 앓게 된다. 그렇다고 이걸 교정하고 지나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희대(稀代)의 사건 하나를 그저 깔아 뭉개고 지나가는 꼴이 된다. 그것이 ‘비판’의 영역 속에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안들마저도 이런 선례(先例)로 아주 지독스럽게 남게 될 것이다.

대체로 사회는 골치 아픈 일들은 가만히 덮고 지나가는 걸 즐겨 한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이 말은 때론 정답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도록 만드는 현실이 있다. 자꾸 진짜라고 주장한다. 여기 저기 고소 고발을 남발한다. 조용히 사라지면 선(先)은 이렇고 후(後)는 이렇고 뒷말들은 무성하겠지만 그렇다고 떠난 자를 어찌 하나.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정작 당사자로 만든 사람이 강제로 어떤 힘에 의해서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마저 들 정도다. 그렇게 되면 이건 ‘사건’으로 남는다. 잊혀지지 않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진법의 정체성을 죽이고 십진법에서 ‘가짜 홍길동’으로 화려하게 부활해보고자 하는지는 모르나 그 시도는 접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해야 할 의무는 반드시 먼저 다 해야 하는 걸 추천한다. 옳건 그르건, 어떤 목적을 가졌건 간에 이진법에서 내가 즐겨 보던 ‘미네르바’ 필명의 그 글이 가졌던 언어의 정체성과 몇 가지의 문제제기는 지금 시점에서도 귀하디 귀하다. 그걸 마구 그렇게 훼손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건 대한민국 이진법 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조만간 전 세계 인터넷 온라인 토론이라는 타이틀로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전례 없는 사건으로 기록될는지도 모른다. 이건 단순한 규제나 혹은 표현 자유, 개인의 인격 이런 것과도 다르다. 너무 엉뚱한 시도라서 별로 가치를 못 느낀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안 되는 일을 왜 하는가, 여기에 초점이 있다.

비망록은 그 일부분을 이야기 해줄 것이다. 5월 이후 정리될 내용들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여러 다른 추적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 정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 그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는 건, 바로 ‘본 자’의 의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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