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탄초난(毋憚初難) 6. 논리적 모순에 빠지지 마라!

담담당당, 2009/11/23

동아일보 진상조사위와 나는 세 차례 만났다. ‘사과문’을 게재하고 난 지난 2월 하순 시점의 일이다.

아주 죽자 살자고 나와 만나려 했던 그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앞도 뒤도 아무 것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 했던 그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도 미네르바 사건의 진상 자체를 모른 채 하는 그들도 보았다.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미리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냥 알량한 웃음들만 흘리는 모습, 영락없는 예단(豫斷)과 목적(目的)을 선명하게 가졌던 이들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한다. 그게 아마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혹은 언론의 취재방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나 많은 이들에게 그들은 언론이 아니라 일단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세력일 수는 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아니라 믿는 모양이지만 지금처럼 해 나간다면 과연 그럴까 싶다.

그들이 내게 물었다. ‘진짜 미네르바는 어디에 있느냐’고. 내가 그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가만히 돌아보니 그들의 어리석음을 먼저 깨어 버리기 위해서 찾고는 싶은 마음이었고 해서 여러 관련자들을 만나보았다. 있긴 있었다. 이미 밝혀진 내용들도 있었다. 그리고는 딱 그 수준에서 나는 멈추었다. 내가 그를 추적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흥미로 그걸 찾아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운 주제였다. 물론 ‘가짜놀음’을 밝히는 건 또 다른 문제에 속한다. 가짜는 가짜의 징표(徵標)에 의해 증빙(證憑)되는 것이니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예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표적을 삼고 들어온 몇몇 언론들에다 아예 누르기 한 판 하자고 덤비는 인물들, 그리고 언론 카르텔인지 아니면 술 몇 잔 혹은 그 이상의 담합에 의한 인맥인지 모를 ‘기자’ 같지도 않은 기자가 쓰는 기사들이 이어졌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허위사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언론, 그 기자는 그냥 ‘언론중재위’만 가면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들도 해봤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언제부터 언론이 그렇게 거대한 신성불가침 권력이었는가. 다 좋다.

바로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란 단어가 생성된다. 이렇게 묻는 인물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짜라면 진짜가 나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 왜? 그 혹은 그들은 누군가 내세운 박대성이란 인물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졌다. 유일 미네르바를 주장해버렸고 검찰이 그를 부분적으로 공인했고 언론 카르텔과 몇몇 ‘빨아주는’ 기사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걸 뒤집는 방법은 오로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박대성이 스스로 유일 미네르바를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대성이 유일 미네르바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내는 것뿐이다. 진짜가 나오는 건 이 논리 속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위논란’이 우선 되어야 할 시점에서 사람들은 정권의 막무가내 여론 통제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표현자유’라는 것을 더 중시하며 토픽으로 선택했다. 주제가 가야만 할 영역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으로 움직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방향을 이끌고 갔다. 처음에는 ‘찌질이’로 폄하하더니만 나중에는 ‘표현자유를 위한 전사(戰士)’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해서 들어가보면 이것이 구린내가 너무 났던 것이기에 선비 연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박재승 변호사가 처음 ‘민청학련’까지 언급하면서 뿌리부터의 조작을 거론했다가 슬그머니 이 주제에서 빠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두 입을 닫았다.

바로 저 지점은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어떤 ‘공백’(空白)이 하나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찾아보지 않으면 이 논리의 프레임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게시판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이른바 ‘친 박대성’ 류(類)의 인물들이 내놓은 논리에서 가장 큰 공백은 바로 저것이었다. 그들 어느 누구도 ‘조작’이란 단어까지 접근 가능한 역량은 없었다는 사실, 이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유일 미네르바’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과도 통한다. 그래서 ‘본 자’는 항상 ‘본 것’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 빠졌던 것이다. 즉, 딱 자기네 아는 만큼 이야기를 한 것인데 거기에는 하나 결정적인 오류가 담겨있다. 바로 위장(僞裝)이란 단어다. ‘fake’, 이 단어 속에 있는 인물을 가지고 백번 천번 이야기를 꾸며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체포 초기 검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버렸다. 왜 하필이면 A4 두 장짜리 글 답지도 않은 글을 쓰게 해서 골머리를 썩혔는가 하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였다. 미네르바 필명이 즐겨 쓴, 그리고 문제가 된 다음 아고라에 그가 그 글을 ‘라인 온’(Line-on) 해서 올리게 하면 그만이었다. 왜 이진법이 아닌 십진법의 종이 쪽지에 쓴 글을 꺼내게 하고 그걸로 ‘짜집기 편집증 환자’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상기해보라. 그 때는 미네르바 아이디 패스워드가 확보되지 않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박대성은 그것을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올리는 즉시 바로 가짜임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었던가? 검찰 컴퓨터는 인터넷이 안 되는가?

모순은 한 번 억지로 꿰어 맞춘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논리적 모순의 첫 번째, ‘진짜가 나오라’ 혹은 ‘진짜를 밝혀라’는 것은 아주 우스운 전제가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진짜가 안 나오면 해결 안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 또한 어디 장사치가 가짜 물건을 진짜로 팔 듯 이 사건을 다루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태원 살인사건’ 같은 영화를 찍는 게 아니다. 이건 그보다 훨씬 정확한 물증인 ‘언어’가 너무도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언어’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증거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 ‘언어’ 속에서 판단한다. 그것이 이미 다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너무 기계적이다. 그것도 인지부조화로 망가져 버린 기계 말이다. 그런 것이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하수의 조작극임을, 혹은 그런 곳에 동조하는 참여자라는 걸 밝히는 꼴 밖에는 안 된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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