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탄초난(毋憚初難) 17. ‘넋’이나 ‘얼’을 빼놓는 방식

담담당당, 2009/12/01

인터넷 사정으로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 여하간 온라인 통제가 많은 나라를 여행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나라도 그리 상쾌하다 말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미 이런 사건도 벌어져 있으니. 그것도 이진법에서 십진법에 이르는 대사건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 한 편 감상하고 이야기 이어간다.

생명은 지속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또 한번 해보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믿음이다.

- 함석헌, 살림살이

나는 아직도 미네르바 사건 자체의 무거움을 작년 이후 오늘까지 고스란히 간직한다. 연재의 첫 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우선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하려고 했던 그 사악한 동기-정권사모펀드, 정권ATM 기기 만들기-라는 사건에서 시작하여 정권의 미디어 산업 재편 화두=이진법과 그것을 완벽하게 하기 위한 ‘장악과 포획’이라는 수단, 정보의 이진법을 통한 유통 확대에 대한 십진법의 저항, 그리고 그를 위해 탄생된 법리적 사건과 인지부조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그래서 좀 복잡하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딱 이 수준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미네르바 말고 다른 이야기 좀 하죠!”

“도대체 누구길래 안 나오는 거냐구요. 박대성은 가짜라는 걸 알지만 진짜가 안 나오니 그냥 가야잖아요!”

“그보다는 더 바쁘고 훨씬 급한 일들이 많으니 일단 제치고 딴 일 생각하죠.”

이런 말들이다. 이게 바로 인지부조화와 패배주의 그리고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식견’(識見)의 유약함을 말해준다. 행동 없는 식자(識者)는 기본적으로 패배주의자다.

나는 세상이 참 바쁘게 돌아간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걸 펄스(pulse)가 빠르다거나 혹은 주파수(frequency)가 아주 급한 곡선으로 돌아간다고도 표현한다. 마우스 투 마우스 하는 인생살이에는 긴 호흡을 가지기가 어려운데, 그게 ‘경제살리기’ 그 구호에 홀딱 빠진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농담 아니다. 사실 뼈 아픈 진담이다. 대개의 이 사회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지식’이란 단어에는 반드시 한 사회를 지탱할만한 안전판이 작동되어야만 그나마 유지가 된다. 그것이 지난 수 년 사이 완벽하게 해체 당했다. 이유는? 그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 국민의 몫이고 탓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본다.

한국 사회를 나누는 세 가지 의식적 지도에는 진보, 보수, 중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겨나고 확장되는 사회 내부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최근에 와서 기득권이 가진 이른바 영지(領地) 재탈환 같은 용어로도 나오고 있지만 가만히 보면 희생자는 항상 서민이다. 10% 미만의 사람들을 기득권으로 하고 그 테두리 밖에서 정작 그들의 사회 포획의 패턴을 모르거나 혹은 그냥 노예처럼 가는 걸 수용하고 인정하는 전제 속에서 움직여지는 ‘패배주의적 매카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걸 혹자는 매트릭스라고 부른다. 어쩔 수가 없다. 그대로 가면 그대로 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가기 싫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사회란 생물이니까. 그래서 투쟁이 벌어진다.

미네르바 필명의 글들이 가진 가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꿈을 깨게 만든’ 각성제 같았다는 데서 많이 찾는다. 그것은 ‘천민’(賤民)인지 혹은 ‘천민’(天民)인지는 모르나 듣기에 따라 약간 자괴감이나 연민이 공존하는 식의 용어가 10월 이후 등장하면서 더 찐해졌다. 10월 이전 글의 핵심은 한국 경제에 닥친 정권의 야욕(野慾)에 관한 것이었다. 폭로(暴露)라고 한다면 능히 그리 이름 붙일 수도 있다. 산업은행이 리먼 브라더스 인수를 포기했다고 정권이 정권 기간 동안 자본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사라지겠는가? 역대 어느 정권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그러나 이번 정권은 그 어떤 정권에 비해서도 ‘그 점에서 사악하다’는 사실과 이유를 고스란히 내뱉어버린 그 글들을 가만히 보며 내버려둔 게 이상하다. 그것을 짓밟았던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상상을 초월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첫째, 왜 가짜 홍길동이 필요했는가? 이 부분은 지금까지도 많은 설명을 했지만 앞으로도 한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둘째, 그를 통해 도대체 뭘 얻고자 했는가? 지금 벌어지는 현상도 그와 관련이 되는가? 당연하다. 이것이 지금 사건을 일으켰고 그리고 가짜 홍길동 판이 벌어진 첫 번째 이유니까.

셋째, 장악된 언론에 의해 나올 정보통제 혹은 정보의 억제라는 관점은 어느 만큼의 무거움을 지니는 것인가? 소통의 부재를 탓할 때라기 보다는 소통이란 명목 하에 완전한 장악을 시도하는 것이 더 사악한 거다.

넷째, 왜 이런 일들에 사회는 침묵하는가? 패배주의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유약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제 서서히 침묵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정권의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다섯째, 결국 대안을 찾아가면 각성(覺醒)이란 걸 하고도 해법이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는가? 그럴 개연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이 기록은 남는다. 그래서 다시 정리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역사다. 그것이 바로 시대가 우리에게 준 여러 교훈 중 가장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의문과 답변이 항상 함께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비망록 제 I 편을 쓰고 난 이후, 그리고 일부지만 공개한 이후에 적어도 이 사안 자체가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 간에 나름대로 확인되고 그에 다른 검증이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수준에서라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자기 손에 ‘똥을 묻히기 싫어하는 선비 연(然)하는 지식으로 넘쳐나 있는’, 한마디로 꼴 사나운 지경이었다는 게 오늘까지 밝혀진 바다. 이에 반대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내게 얼마든지 ‘그 잘난’ 고개 쳐들어주어도 좋다. 내가 헛된 기대를 했다.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민나 도로보데쓰’, ‘모두 도둑놈이야’ 외치던 그 헛소리 속에도 진실 같은 게 있다는 거다. 지금이라고 본질이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지식이 이처럼 개판인 줄은 미처 몰랐다는 탄식(嘆息)이 매 순간 절로 나온다.

‘넋’이니 ‘얼’이니 이야기 백날 해도, 혹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친인들에게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 이 사건 하나 속에서는 모두 처절하게 ‘바보’가 된다. 그러면서 ‘교육’을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뭘 배우란 말인가? 생존술? 살아남기 위하여 어떤 수준까지 교활해지는가,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 마치 용산참사를 뻔히 보고 있는 모습과 미네르바 사건과는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해도 좋을 듯하다. 무책임하다는 말이다. 사회 자체가 그렇게 돌아간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라면 한국 사회는 죽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여러 차례 그렇게 말도 했다. 이제 보니 죽은 게 아니라 썩고 있어 냄새가 너무 난다. 풀풀 그 구린내에 모두 취해 있다는 게 옳다. 오물 통에 빠져서도 히죽대고 있는 모습인 셈이다. 이게 전부인가?

이렇게 만든 방식이 독특해서 이 말을 꺼내는 거다. 하늘에 대고 욕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 사회에 ‘쌍욕’을 한다.

‘경제살리기’. 이 말 참 좋긴 하다. 그러나 어문학으로 분석하면 ‘죽어야 살린다’거나 혹은 ‘죽어가니 살린다’는 것은 존재하지만 ‘살아있는 걸 더 살린다’는 건 별로 가슴에 와닿는 게아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가슴이 근육이 울퉁불퉁 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이가 하는 운동과 적어도 망가진 육신을 재활(再活)이란 영역 속에 끌고 들어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금의 잣대가 딱 이 꼴이다. 구분도 없다. ‘경제=나 잘 살기’라는 이기주의적 경제관으로 해석되는 것이 어느 시절의 자본주의의 절대원리인 양 움직인다. 그래서 넋도 얼도 모두 버려 버린다. 잘났다 참!! 그래도 정도가 있어야지 않나!!

미네르바 이야기에 왠 이런 쉰소리를 하나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말, 연재 첫 글부터의 생각을 아직 잘못 읽은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언어’라는 것과 ‘메시지’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걸 중심으로 말을 한다. 살아남아라 외치는 건 전쟁터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다. 그런데 도망치라는 뜻이 아니다. 최대한 치열하게 싸우지만 개죽음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전쟁 다 도망치면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다. 사면(四面)에서 초가(楚歌)가 들리고, 엉엉 울고만 있는 병사들이 무슨 전쟁을 하나!!

‘박대성’,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죽여버린 그야말로 기득권이나 그를 만든 조작한 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한 ‘찌질이’의 원형에 가장 접근되고, 그 속에서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몫을 찾으려고 안달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곡마단의 곰’이라는 표현이 별로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지만 계속 고소 고발을 남발한다. 저작권이니 혹은 다른 것으로. 빤히 쳐다보는 수준의 흥미의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가 했건 혹은 그의 이지(理智)가 아닌 다른 형태의 머리를 빌린 사안으로 진전되었건 간에 일단 책임은 모두 최종적으로 ‘그’에게 귀책(歸責)된다. 본인이 미네르바, 그것도 유일 미네르바를 자처한 이상 말이다. 서면 인터뷰, 고소장, 원고를 누가 대신 써주었건 간에 변함이 없다. 그 말 중의 모순이나 혹은 거짓까지도 모두 그는 무한 책임져야 한다. 기피(忌避)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미네르바 생존경제학’ 같은 가짜 책을 쓸 때가 아니라 ‘박대성 생존활로 찾기’라는 쥐구멍 찾기를 해야 할 때다.

앞서 시대정신을 잠깐 언급했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에게 넋이니 얼을 말한다. 하나씩 들여다 보기 이전에 먼저 이 이야기를 해두는 이유는 그가 과연 이 글을 읽고 인지하는지 아닌지를 보기 위함이다. 지난 1월 이후 5월까지 글을 봐도 그렇고 더군다나 그는 구치소에서 나와 아고라 댓글 놀음 속에서만 빤짝 존재했다. 빤짝, 그랬다. 인터뷰, 강연, 그리고 출판에서조차 그는 일단 기본부터 저기 확장까지 모두 ‘정신과 가치’를 구현하는 데는 모두 실패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좀 어려운가? 쉽게 말한다. 당신은 이 글을 보는가 아닌가,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인가 구분하기조차 참 애매한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나는 평가한다는 말이다. 마치 구치소의 그를 찾아가서 누군가 던졌던 질문에 전혀 엉뚱한 다른 답변을 했던 그 ‘아스퍼거 연(然)’ 했던 모습에서 지금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 그는 지금 온라인의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의 여러 글들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 그가 미네르바? 개가 웃다가 피 토하고 죽을 일이다.

‘미네르바’ 필명의 글은 그런 증후군이 쓴 것이 아니다. 아주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이성적 판단력이 뛰어난 자의 글이었다. 시점에 따라, 사안의 경중에 있어 약간 격렬한 감성적인 것, 그런 인화성 강한 기질은 존재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하다 못해 넋이니 얼은 정확하게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는 말이다. 그걸 박대성이란 개체를 통해 모조리 빼앗아간 자, 그 방식은 어떠했는가 생각하는 것도 이 연재의 아주 중요한 하나의 탐색 기록이다. 지금은 ‘그 빼앗아 간 자’-복수일 것이고 복수라고 본다-가 누구인가를 찾는 게 사실 이 연재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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