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2/02
지난 2월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미네르바’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다. 우리가 흔히 ‘미네르바’라고 하면 꽤나 ‘정보’를 한다고 하는 사람의 기본으로는 반드시 두 인물 혹은 그 이상을 언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전체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비밀스럽게 글을 썼는지 그 이유까지 정확하게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리 표현했던 것뿐이다. 물론 왜 그랬는지는 당시에도 그 글들의 흐름과 내용 등에 비추어 어렴풋하게는 알았다. 그러나 내가 그 행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영화 라쇼몽의 그것과도 같은 ‘이유와 명분’이란 객관성의 율법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을 찾아보는 첫 작업이 바로 신동아K인 김재식과의 접촉 수준이었다는 건 이 일의 기본이었다. 그가 이른바 10월 이후 등장한 ‘고구마 파는 늙은이’라고 보았기에 그랬고 그 이전 단계에서 리먼 브라더스 등 사안을 직접 건드린 다른 필자-뒤에서부터는 ‘리먼K’라고 부른다-와의 접촉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어려웠다. 당연히 10월 이전 ‘미네르바’를 찾기 위해서는 남겨져 있는 현장인 거기서부터 출발이 되어야 했고 그 점은 지금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질 바가 없다. 그 내부적인 관계도의 구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은 지금도 쭉 이어진다.
내가 지난 2월말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알았던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미네르바’ 사건 자체가 리먼 브라더스를 산업은행이 인수한다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권과 관련된 정권 초기 초유의 대 폭로 사건이었다는 점,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그의 ‘글’로 인해 크게 빚진 게 있다는 점이었다. 산업은행이 리먼을 인수했다면 ‘한 방에 블루스’라는 속말처럼 그렇게 나라 하나가 작단(斫斷)이 날 뻔 했다. 그것도 천천히 고사(枯死)까지 이어질 정도로 말이다. 이 세대가 할 짓이 아니었다. 다음 세대 얼마를 희생시킬지 도무지 예측조차 쉽지 않았던 일이다.
둘째, ‘미네르바’는 정권과 언론, 기득권이 이야기하는 ‘찌질이’가 아니란 점이다. 그것은 그의 글에 대한 폄하(貶下)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들의 논리일 뿐이다. 십진법 기득권을 말하지만 이진법이 주는 소통로에 관해 기득권의 불안심리가 가중되면서 만들어진 ‘구호’가 바로 ‘찌질이’였다. 이진법(온라인)을 통제하려는 정치세력들의 노력이 전방위적이었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셋째, ‘박대성’은 가짜라는 점. 그를 통해 박대성을 가짜로 만드는 세력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기획적으로 움직였다는 점. 그것은 100% 조작(造作)이었다. 국가 전체가 하나의 조작된 쇼를 벌이는 매개(媒介)로 동원되었다. 그런 그는 여전히 활개친다.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걸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부끄러움이다.
넷째, 그 상태에서 이 사회는 지식사회건 사회지식이건 이 ‘쇼’를 열심히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의아해 하거나 몰지각에 무관심하다면 그게 바로 노예정신에 불과하다. 그 당시로 돌아가보면 이건 앞도 뒤도 없이 모두 제 정신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땅 같이 보였다. 지식? 무슨 지식?
그런 지식은 개나 줘버려라 그래라!!
한국이란 사회가 아니라 이 당대의 시간에 대해 아주 지독스러운 환멸(幻滅)을 느낄 정도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참고 참았다.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그 과정에서 ‘미네르바’라는 실체를 찾아보는 작업을 지난 5월까지는 했다. 그리고 그 일부를 세상에 툭 던졌다. 그 이후에는 다른 일로 많이 바빴지만 그래도 간간이 챙겨는 봤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금까지 챙겨본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침묵하거나 혹은 멀리 도망치거나 혹은 여전히 곡마단의 곰처럼 잘들 놀고 있다. 앞으로도 겁도 없이 뭘 믿는지 모르나 고갤 쳐들 대상도 없지 않을 터이다. 사회가 이런 판이니 이들에게는 ‘약간의 주의(注意)’ 수준이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시궁창 냄새 나는 비웃음까지 느낄 정도다. 그 ‘비웃는’ 대상이 전 국민이고 이 사회, 시대이고 그걸 뻔히 보고 있는 것도 사회이고 시대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왜 ‘무탄초난’(毋憚初難)은 어려운 것인가?
간단하다.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는 것이 패배주의의 기본이고,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 이래 늘 패배주의가 지배했던 사회에서 제대로 된 정신이 나왔던 적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쉽다. 이 사건에서 첫 발걸음을 디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인가? 바로 정권 초기 왜 이러한 시도와 진행, 그리고 사악함이 두드러지게 되었는가에 그 문제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누적(累積)되고 있다. 해소(解消)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대성’일 뿐이다. 그를 우리 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처럼 통해보는 한국 사회의 오늘, 정권과 그 하수인의 현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습 하나 하나가 몹시 정치적인 프레임인 셈이다. 그게 경제, 나아가 이 시대, 사회에 강력한 너무나도 처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박대성을 옹호하려는 세력은 ‘매국노’(賣國奴)다.
이제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박대성’이란 기호는 철저하게 사건 속에서 조작된 매개지만 그를 감싸기 위해 직간접으로 동원된 자들이 정작 무엇을 감싸고 있는가를 잘 보라! 그것이 단순히 정권이고 정권 하수인이란 관점이 아니라 ‘한 방에 나라를 날릴 수 있는 음모’를 깬 바로 그 행위를 죽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똥 싸질러 놓고도 내가 뭔 죄냐고 뒤집어 씌운 꼴이다.
그리고 마구 우긴다. 그 모든 일들이 그저 ‘찌질이’의 가치 없었던 토설(吐說)이었다, 역시 이진법의 주장들은 찌질이들의 판이다라고 마구 외친다. 알량한 기득권의 권력인지 뭔지 가져서 잘났다고 힘세다고 그저 입에 튀어나는 대로 지껄인다. 그것이야말로 매국에 대한 ‘물타기’다. 그에 동참한 자는 모두 매국노라는 등식은 대단히 유효하고 정확한 것이 된다. 이게 어디 보수 진보 중도 이런 정치적, 정치성향의 구분법 속에 있는 단어라고 착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그냥 간단하게 ‘매국’(賣國) 했다고 하면 되는 일이다. 침묵한 자의 언어들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동참이라는 범주에서 한 치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상한 ‘평화론’ 같은 건 지껄이지도 말라! 어떤 평화는 철저한 투쟁 속에서만 나온다.
매국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어가 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 사건도 아주 자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내가 이 사실에 관해 알고 있는 한, 토설(吐說)은 쭉 이어질 것이다. 듣거나 말거나 상관 않는다. 이건 기록이니까. 아마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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