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2/14
이 연재의 제목이다. 그리고 그 엉터리 동아일보사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해서조차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정중했던 반박 소견을 썼을 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를 위해 채근담(菜根譚) 속의 이 단어를 끄집어 내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이진법과 십진법을 연결하는 그 험난한 첫 일을 했고 또 그로 인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험구(險口)들 속에서 힘들어 할 때, 나는 그를 위하여 이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온당(穩當)한 것은 쉬운 일인 듯하나 그것이 없기에 사회가 퇴보(退步)한다. 시대가 죽는다. 그러니 더욱 더 그것, 그 정신을 찾아야 한다. 그 노력마저 없으면 정말 이 사회 시대는 죽어 가며 썩는다.
많은 이들이 이 연재에 관하여 염려(念慮)의 소식들을 보내온다. 내용의 무거움에 관한 걱정들이다. 피해 혹은 압박에 관한 일반적 두려움이기도 하다. 심지어 저기 어디서 고용되었는지 반드시 찾아봐야 할 ‘알바’나 혹은 어느 인지부조화의 벽에 갇힌 건지 모를 ‘알밥들’에 관해서도 그 번거로움을 거론하는 말도 들어온다. 그건 약속대로 조만간 처리한다.
여전히 얼마 전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들에 대해서도 전혀 고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특유의 시간 끌기 명분은 있다. 확실한 게 없다는 거다. 조금은 우스운 논리구조다. 주로 그간 이 일에 나름 접근했다던 언론들이다. 제대로 질의를 해내어 사실관계를 밝히지 못했던 잘못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접근법이 잘못되었다 순순히 인정하기 싫은 그 알량한 체면 문제인가! 그러나 잘 보기 바란다. 이 연재, 거기까지는 모두 하나씩 길을 밟아 들어가보려 하니까. 불편하더라도 봐야 할 일은 봐야 한다.
내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다. 그래서 내 가슴에 어느 산(山) 하나를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속에 깃들어 잠들거나 아니면 아예 품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그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상쾌한 기분을 유지하거나 모두 이 사안을 대하는 내 마음을 조절하기 위한 나의 약간 방법이며 실재다. 이 시대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박대성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곡마단’의 구성 면면을 보자면,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이 사회가 그에 대응했던 양식까지 감안하면 이건 부끄러워 저기 쥐구멍에라도 대가리를 쳐 박아야 할 정도다. 헌재 재판변론을 보도하는데도 어느 신문은 버젓하게 ‘미네르바 박대성’이라고 적는다. 아주 웃기다. 모두 기록된다. 그 판단! 그게 보수이건 진보이건 중도이건 뭐건 관계없다. 틀린 건 틀린 거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솔직히 한심하다. 그냥 헛 웃음이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 같아서는 저들이 바라는 대로 무관심해주고 싶은 대상이다. 그렇게 해주질 못하겠다. 명백(明白)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수준에서도 근본적으로 드러날 것이 다 드러났다. 인지부조화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그도 아니라면 감각적으로 따져 들어가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라. 그럼 한 가지의 답은 얻을 것이다.
그것에는 늘 세 종류가 나타난다.
49 : 51
50 : 50
51 : 49
부정적이라 해도 100%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까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판단을 유보하느냐에 관한 것인데, 이 생각이 비어있던 곳을 하나씩 더 찾아가고 채워지는 과정에서 사실 100%, 1000%라는 비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걸 다 채워보는 작업을 한 번만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안다. 그게 바로 <사회지식>이다.
지금 박대성 사건은 100% 조작이다.
우리는 지금 ‘가짜 가짜’를 보고 있다.
지난번 어떤 이에게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시점부터 우리가 따져야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을 뿐이라고.
하나는 박대성이 왜 가짜인가를 다시 정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 마지막 하나는 왜 미네르바 필명의 그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도대체 어떤 공과(功過)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첫 머리가 그 다음으로 쭉 이어지는 연계를 가지게 되어 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가다가 길을 다 가지 못하고 끝낼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첫 머리는 연재 초반부 정도로도 첫 번째 과제는 다 끝났다.
사실 ‘그들’에게도 약점은 숱하게 많게 보인다. 당장 비겁(卑怯)하다는 평가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무슨 목적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연결된 여러 방면들이 좀 복잡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럼 저 세 가지 숫자의 범주에서 당신은 어떤 쪽인가만 이야기 하면 된다. 굳이 그걸 다 채워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드러난 사실마저도 부인하면서 굳이 ‘박대성이 미네르바다’ 고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럼 맞다는 증명이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보면 된다. 괜시리 케이블 TV에 나와서 “내가 맞는데도 나를 증명하라 해서 힘들었다”, 이런 개소리나 하지 말고 말이다. 그에 장단 맞춰서 개소리에 함께 짖지 말고!!
‘미네르바’ 필명에게도 나는 ‘무탄초난’이라는 공(功)을 반드시 돌린다. 그가 작년 리먼 브라더스를 산업은행이 인수하려고 시도할 즈음에 꺼냈던 그 반대의 담론은 정말이지 이 사회의 당시와 오늘, 내일에 이르기까지 몹시도 유익한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확연히 더 가치 있게 증명된다. 그리고 노란토끼로부터 통화스왑에 이르기까지, 그에 천민경제학에 이르는 새로운 형식을 통한 민중의 자각이란 문제를 들고 나온 점도 모두 각각과 종합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걸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자들은 무엇 하는 자들인가! 그건 솔직히 언급의 기본 가치 자체를 가지지 않는 대상이다. 그래서 나는 그걸 ‘매국’(賣國)이라 정의한 바도 있다.
세상은 항상 옳은 일이 승리하지는 못한다는 걸 나이가 먹어 가면서 알게 된다고들 한다.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라면 세상의 삶에 어떤 잣대를 가지고 살아야 하나 자기 갈등은 필연이다. 당위(當爲)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최소한 지키고 살아야 하는 시대의 룰도 있는 법 아니겠나 싶다. 그런 점에서 미네르바, 그리고 박대성 사건은 우리 사회에 아주 근본적인 질문 몇 가지를 던져준다.
좀 어려운가? 그렇기도 하다. 가볍고 경쾌하게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정보나 귀동냥 하거나 혹은 그러한 것을 놀이 삼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무거운 주제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도 않다. 그러니 문제다. 또한 우리 곁에 늘 있는 주제이니 떼낸다고 해서 멀리 도망가거나 완전히 파묻어질 주제도 아니다. 이진법에서 이런 토론을 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십진법이 그걸 해결해주지 못하는 바에 이진법의 가치는 그대로 남는다. 서로가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다. 통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시작해서 여기서 주로 살게 되는 다음 세대의 삶을 지금 와서 마구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떻게든 조화롭게 해야 하는 명제가 우리에게 주어진지 한참이다.
무탄초난(毋憚初難). 이 단어의 무거움을, 그리고 온당함을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그 근본과 실재를 왜 찾아야 하고 왜 이리 하는지에 관한 생각, 그런 주저리다.
* 아고라에 글을 올리면 명조도 고딕으로 고딕도 이상하게 변형됩니다. 그냥 MS워드 친 걸 올리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의 막 시작한 카페에도 글을 함께 싣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글들도 함께 올립니다. 읽으시는데 불편을 끼쳐서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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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포털 다음의 토론공간인 "아고라 경제방"에 게시됐던 글입니다. 다음측에서 일방적으로 글을 차단조치하였기에 부득이하게 이곳에 복구해 두었습니다. 원래 게시됐던 글에 달렸던 댓글은 이곳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