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2/15
주간지 ‘시사인’은 통권 제85호(2009.4.27)에서 박대성과의 인터뷰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사실 박대성이 구치소를 나와서 오마이 뉴스와 그 ‘엉터리’ 대담-질문도 답변도 모두 그랬다-을 하고 난 이후 가진 진보 계열의 매체와는 첫 인터뷰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이전 서면 인터뷰와는 달랐으니 뭔가 다른 질의도 섞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건조하다 할 만큼 그냥 박대성의 견해만 달랑 받아 적은 꼴이 되었다.
왜 질문이 이 정도 수준에서만 그친 것일까? 왜 그래야 했던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톺아보기를 해보도록 하자. 질문과 답변 전체에 대한 리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과연 그에게 <잘 질문 하기>라는 것도 절대적 숙제처럼 드러난 듯하니 말이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00
흥미롭지만 ‘시사인’이란 매체가 가진 색깔로 봤을 때 이 정도 수준에서 박대성을 대했다는 건 거의 자발적 인정이나 진배가 없다. 그러니까 시사인은 박대성을 미네르바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그건 그들 독자들에 대한 아주 무책임한 접근법이었다. 그 점에서는 위클리 경향 제811호와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4월 바로 그 당시에도 이 트랜드가 광범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는 증거기도 하다.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그의 하소연을 대변해주는 장으로 이 인터뷰는 변질되어 있었다. 그냥 박대성과 한 번 인터뷰를 했다는 수준에서 보면 딱 그만이었던 것이다. 직론 직설 언론 특유의 날카로움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건 첫 도입 부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촛불’ 이후 닥친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 받으며 정권을 위협했던 논객 미네르바.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살아 있는 모습에 당황했다. ‘촛불의 유산’ 미네르바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전제 자체를 과거의 여러 발언과 자료, 상황에 입각해서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는 모드를 맞추었다 보니 이 정도 수준이면 인터뷰가 아니라 이른바 신변잡담 형태라고 보는 게 옳다는 판단마저 든다. 이 인터뷰 이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레베카 맥키논-박대성> 간의 인터뷰를 한 번 보라. 아래 인터뷰가 도무지 인터뷰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지-그냥 잡담수준으로- 상상이 가지 않는가!
http://blog.daesan.com/2009/12/02/minerva-2-2-parkdaesung-interview-mackinnon
맥키논의 질문 포인터는 다음 9가지로 정리되었다. 아래 인터뷰에서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맥키논 인터뷰는 통역을 둔 상태에서도 2시간 15분, 시사인의 인터뷰는 그냥 한국말로 해서 3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맥키논의 질문 요점이다.
왜 이런 현상은 나타난 것일까? 우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사인이 박대성을 만났을 당시 그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말을 심하게 더듬거나 혹은 완결된 문장이 아닌 중언, 부언 그리고 미완 상태에서도 다음을 잇는 형태의 아스퍼거 증후군 특유의 어법을 구사했을 것이라는 점부터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시사인 기자는 지금도 그 때 녹음 파일을 다시 풀어서 정리해보면 그걸 여실히 느낄 것이다. 문제는 그걸 그대로 낼 수 없다는 이유로 재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말을 다 빼버리고 나니 그냥 인터뷰가 확 줄어버렸을 것이다. 1 시간도 걸리지 않을 내용으로 3배나 긴 시간을 잡아 먹고도 쓸만한 게 없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게 지금까지 박대성이 그간 보인 화법이었다. 요즘 많이 ‘훈련’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아직 한참 멀었다. 당시에는 차라리 그대로 최대한 ‘어눌함, 어색함’을 살려서 올리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그건 어려운가? 그러니까 뭔가 밝히려는 게 아니라 무슨 행사 하나 찍으러 간 꼴이었다는 이야기다. 그걸 독자에게 보여주었으니 문제였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인터뷰가 진행된 4월 27일 시점에서 박대성은 분명한 논란 속에 있었지만 동아일보사 본사가 끼어들면서 사과문이니 진상조사 보고서니 뭐니 하면서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동아가 한 방 먹었다’ 수준으로 접어지고 있기는 했던 것이다. 그러니 슬그머니 시사인도 그 이상으로 들어갈 생각을 않았다. 그냥 한 발 물러선 것일까? 솔직히 좀 비겁했다. 아주 비겁했다고 나는 개인적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 때의 모든 진보 언론들이 대부분 아니 거의 모두 그랬긴 했지만 말이다. 조선과 동아야 이미 곡마단에 들어간 상태였고. 그러니까 앞서 경향(위클리 경향 811호)의 경우처럼 그들이 정한 거대한 인지부조화의 트랜드 속으로 그냥 쑥 빨려 들어가려고 작정을 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 인터뷰를 꺼내 보면 솔직히 어렵게 따내 기사를 쓴 기자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완전 엉터리’다. 전혀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야 옳다. 왜 그런가? 거짓말을 검증할 수 있는 내용이 숱하게 많이 등장했음에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재질의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참 좋은 세상이다. 대충 거짓말하면 먹힌다는 건데, 이 정도 수준이니 박대성이란 페이크 모델이 이처럼 오랫동안 활개를 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주요 내용을 한 번 보자.
1) 중학교 3학년부터 경제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책인가? 그에 대해서는 아무 지표가 나와있지 않다. 당시도 그랬지만 이른바 서면 인터뷰 가운데서 ‘맨큐 경제학’을 봤느니 마느니 이야기가 한참이었다. (발간 시기와 읽을 때의 편차가 있다. 읽었다는 바로 그 때 책은 없었다) 인터뷰 가운데 과연 어떤 경제 관련 서적을 보았기에 그것을 <마니아 차원>이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중3의 경제마니아? 과연 무슨 책을 읽었을까? 마니아로 중3부터 활동한 박대성을 대학 지도교수는 ‘경제분야에는 감각이 없다’고 왜 했을까? 꽤 공부를 많이 했을 텐데 말이다.
2) 말투의 동문서답, 마이동풍, 횡설수설이 아니라 <내용>이 그랬다. <언어>가 그랬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 가운데서 글이나 혹은 말의 미묘한 표현 차이와는 다른 문제였다. 즉, <이해도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질문자는 이것을 아주 착각하는 가운데 이 인터뷰를 시작했던 셈이나 다름이 없다.
3) “어색한 표현을 최대한 살려 정리”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무 각색했다. 솔직히 레베카 맥키논 인터뷰 이후 백지연과의 TV 대담은 어떻게 연출된 것인지 모르나 꽤나 연습을 많이 한 흔적이 있었지만 4월 당시를 감안한다면 아마도 10월의 레베카 인터뷰보다 못하면 못했지 좋을 턱은 없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최대한’ 살렸는가? 지금 시점에서라도 인터뷰 녹취 푼 것과 인터뷰를 글로 정리한 것을 비교해보고 싶다. 그럼 전혀 저런 의미가 아닌 곳도 많이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사실 사회에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고 기록이 된다. 그걸 살리지 못한 ‘글’은 의미가 별로 없다.
4) 인터뷰의 첫 머리가 박대성의 건강, 정신적 상태, 그리고 감옥생활로 인한 불편 등으로 인하여 정상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아 버렸다. 그럴 거라면 왜 인터뷰를 했나? 차라리 이건 인터뷰가 아니라 좀 나쁘게 표현해서 거의 언론계의 속말로 ‘빨아주기’ 비슷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날카로운 맛을 애초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의미다.
5) 박대성은 출소 하자마자 아고라에 이른바 ‘댓글 놀음’이란 걸 밤 늦게 새벽까지 했다. (그 자료는 나중에 재정리한다) 그러니 아고라에 들어가보지 않았다? 그건 거짓말이다. 당연히 들어가려고 시도해봤고 해보니 전혀 되지 않아서 그만둔 거다. 시작하자마자 ‘미네르바’의 그 언어가 나오지 않으니 많이 당황했던 건 오히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었다. 우습게도 박대성은 계속 거기서 말을 하고 싶어했다. 그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인터뷰를 했던 것인가?
6) ‘동문서답’한다는 지적에 대해 박대성은 질문이 포괄적이어서 그랬다고 했다. 포괄적(包括的)이라! 미네르바 필명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자. 적어도 그는 즉문즉답에 아주 능했다. 댓글을 달고 그에 답할 때의 순발력은 매우 민첩할 정도의 즉답(卽答) 시스템을 가동할 줄 아는 언어표현력을 지녔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가 그냥 접어질까? 글과 말이 다르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 흐름은 똑 같은 것이다.
7) 자신에 대한 뉴스 모니터링…그걸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인터뷰 질문을 한 사람은 미네르바가 작년 10월 말 이후부터 살해협박이나 혹은 경제관련 글을 못쓰게 된 압박을 거론한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모니터링을 한 사람만이 가능한 토로(吐露)였다. 그런데 했느냐, 안 했다, 뉴스보고 알았다…이게 정말 질문을 한 것이고 답을 한 게 맞기는 한 것인가!!
8) 앞서 위클리 경향의 글에서도 나왔지만 질문의 수준이 왜 고구마 파는 늙은이라고 했나가 아니라 미네르바 글에 있던 참으로 많은 개념어를 꺼내는 게 인터뷰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여우사냥’, ‘미자’, ‘빨대’, ‘노란토끼’ 등의 언어들은 전혀 질문 대상에 끼워두지 않았던가? 아니면 질문을 했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충 그건 심심해서, 혹은 별 뜻 없이 했다 그러고 마니까. 그러나 미네르바의 글 자체를 읽지 않고 박대성을 인터뷰 했다는 자체가 어떤 위험한 상황인가를 너무 몰랐다는 점에서 피해갈 수는 없다.
9) 주식이나 펀드 안 했다. 왜 안 했냐면 할 말이 없다. 현장에서 주식도 안 해본 사람이 도저히 쓸 수 없는 외환 딜링룸 정보는? 다시 이 인터뷰를 보면서도 솔직히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경제에 대한 관념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 행위와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그저 짜집기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품었던 건 아닌가 싶고, 많이 아쉽다. 참고로 박대성은 집을 융자 내어 부동산경매 펀드를 했다고 그의 가까운 사람이 이야기했다 하고 그것을 나중에 부인하기도 했던 적도 있다. 주식 투자도 했다고 전해진 것도 있다. 4월 그 즈음에는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10) 2008년부터 다음 아고라에서 글을 썼다느니 혹은 하루에 10편도 넘게 쓴 것을 이메일이 와서 쓰다 보니 그랬다고 한다. 박대성은 2월 5일 CBS 인터뷰에서도 그랬고, 이메일을 확인한 적이 없다고 했다. 위클리 경향의 정용인 기자도 그게 특수한 경우라고 했다. 그런데 이 후속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참 흥미롭다.
이 밖에도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굳이 미주알고주알 지적 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정리는 다시 할 것이다. ‘모처의 지인집’이 아니라 김승민의 서초동 오피스텔이 아니었나? 김승민이 지인? 아니다. ‘변호사 보좌역’이라 했던 사람이고, 지금은 지인이 아니라 완전 ‘한 패’다. 월간조선은 8월호에서 김승민을 ‘박찬종 전 의원 보좌관’이라고 명시했다. 사실인가?
2009년 4월 당시 한국 언론이 박대성을 대하던 입장은 지금도 여전히 똑같이 이어진다. 겉으로는 분명 그렇다. 딱 그 수준에서 유야무야(有耶無耶)에 동의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숱하게 많은 누실(漏失, 구멍)이 생겨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건이나 사고의 형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사회지식 전반에 대해 강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게 과연 대충하고 지나가야 할 일에 속하다고 보는가? 나는 그런 발상법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아래 <시사인>의 박대성 인터뷰는 내가 본 유사한 그런 것들 가운데서는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시점에서 사안의 중심이 뭔지도 잘 모르는 것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독립 언론에도 접근의 한계가 있는 것인가? 지금 다시 박대성을 인터뷰 하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인터뷰가 아닌 다른 형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이 박대성과 인터뷰를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요즘도 여전히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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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막에서 다이아 캐길 바란다” / 시사인 통권 85호 인터뷰 전문
‘촛불’ 이후 닥친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받으며 정권을 위협했던 논객 미네르바.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살아 있는 모습에 당황했다. ‘촛불의 유산’ 미네르바는 누구인가.
[85호] 2009년 04월 27일 (월) 16:05:58 박형숙 기자 phs@sisain.co.kr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경제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는 박대성씨. 그는 마니아 차원에서 경제 공부를 해왔다고 밝혔다. 출소 직후 굳은 표정이었던 박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번에는 미네르바의 ‘말’이 화제다. 표현의 자유 논란의 핵심에 섰던 인터넷 경제 논객 박대성씨(31). 미네르바라는 필명이 더 익숙한 박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실명의 자유인으로 대중 앞에 섰지만 뜨거운 환대도 잠시, ‘진짜 미네르바 맞느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차갑다. 특히 그의 ‘고향’이라 할 다음 아고라에서는 가짜냐, 진짜냐 공방이 더 커졌다. 한마디로 “글과 말의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누리꾼들은 민망, 충격, 당황한 모습이다. 박씨의 말투에 대해 동문서답, 마이동풍, 횡설수설이라는 비난을 쏟아내며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던 촌철살인의 압축적 논법이 그립다”라고 말한다. 과연 신화는 깨졌는가. 김태동 교수는 여전히 “앞으로 많이 클 사람이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4월22일 박대성씨를 만나 3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주변의 시달림을 피해 모처의 지인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인터뷰는 그의 ‘어색한’ 표현을 최대한 살려 정리했다.
100일 동안 구치소 밥은 잘 먹었나.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짬 처리’(음식물을 변기에 버리는 것)하다가 변기에서 음식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주변에서는 말렸는데 본인이 언론 인터뷰에 의욕을 보인다고 들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수용자가 원하는 대로 해드린다.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그거다. 기가 막힌 건 그동안 이 깨물고 말을 거의 안 했는데 (출소 후) 말을 처음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니까 (엉겁결에) 그냥 한 것도 있다.
불편해도 상대방에게 맞추는 편인가.
웬만하면 맞춰준다. 내 가치관을 넘지 않는 이상 해준다.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감기몸살에, ‘깜방’에서 독기가 쌓였다. (방송에 비치는) 내 자세가 불량스럽다고 그러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허리가 아프고 몸이 안 좋으니까 표정이 찡그려진 것이다.
다음 아고라 들어가 봤나.
안 봤다. 보면 열받으니까.
‘말을 못한다’ ‘동문서답한다’는 지적이 많다.
(기자들의)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니까 무슨 말인지 나도 잘 모르겠더라. 그래도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나. 경제 상황은 어느 정도 시간을 가지고 봐야 하는데…. 마치 사람들은 나에게 사막에서 다이아몬드 캐라는 식이다.
화가 나지 않나.
주관적으로 보면 감정이 개입되지만 관찰자 시선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싶지 않았나.
기자가 (사진 촬영을 위해) 컴퓨터 열어보라고 해서 한번 해본 게 전부다. 혹시라도 (나와 관련한 뉴스나 글을) 볼 수 있으니까 들어가고 싶지 않다. 체포될 때 생각이 난다. 1월7일 오후 2시였다. 친구 만나러 나가려고 가방을 싸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법무부 장관의 경고가 있었는데 예상 못했나.
상식 수준에서 허용되는 기본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구나 생각했다.
검찰 조사는 어땠나.
‘간첩 원정화 사건’에 대한 비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는지 캐물었다. 땅굴이 24개인 걸 어떻게 알았냐는 둥….
그 자리에서 검사에게 항의했나.
내가 보기와는 다르게 경로사상이 투철한 인간이다. 나이 든 분에게 대놓고 말 못한다.
김태동 교수가 당신을 ‘국민의 경제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검사실에서 조사받다가 알았다.
자신에 대한 뉴스를 모니터링하지 않나.
글 올리기도 바쁘다.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 시점을 중시하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 마감뉴스를 보다가 법무부 장관이 ‘범죄 구성요건 되면 수사한다’(11월3일)고 한 발언을 보면서 황당하고 난감했다.
‘인터넷 경제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도 몰랐나.
지난해 10월 말쯤 알았다(당시 기획재정부에서 김광수, 미네르바 등 경제 논객과 소통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하자 언론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하다 말겠지, 일시적이라고 생각했다.
출소 후 당신에게 실망한 누리꾼이 많다.
나는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날 나쁘게, 좋게 생각하는지 떠나 다양성을 존중한다. <신동아> 가짜 미네르바 사건이 터졌을 때도 크게 괘념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데 (진위 논란 때문에) 수갑 차고 묶인 상태로 이틀 동안 추가 조사를 받았다. 짜증났다. 그때 기억이 난다. 1105호실(오현철 담당검사)에서 창문 밖으로 ‘JW 메리어트 호텔’ 네온사인 간판이 보였다. 검사 얼굴 맞대면하기 싫으니까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럼 만화 같은 데서 나오는 것처럼 음침한 악마의 숲이 보이고…. 내가 간판을 보면서 대답을 하니까 검사가 “나랑 눈 마주치기 싫어요?” 그러더라(웃음).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100여 일 만에 무죄로 석방된 박대성씨(가운데)에게 어머니가 두부를 권하고 있다. (사진)
정면을 잘 쳐다보지 않던데.
카메라 플래시 수십 개가 터지는데 눈을 어떻게 뜨나. 감기 몸살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말투가 문어체에 가깝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라고 하더라. 작정하고 그러는 건 아니다. 쌀밥 먹다가 갑자기 빵을 먹을 수 있겠나. 노력 중이다.
집에만 있는 은둔형 아닌가.
막말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고 하는데 나는 방에만 있지 않는다. 사람과 컴퓨터, 반반씩 시간을 할애한다.
왜 자신을 ‘고구마 파는 노인’이라고 표현했나.
순간적으로 그렇게 쓰고 싶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고구마를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집 이웃에 노인이 많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자주 오신다.
‘미국 금융계에서 일했다’며 고해성사는 왜 했나.
예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자전 수필의 내용이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감명 깊게 읽은 에세이였다.
백수인데 그동안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했나.
대학 졸업 뒤에 6년6개월 동안(2007년 후반까지) 일하면서 몇 천만원 모았다. 그 돈으로 공부해서 새 출발할 생각이었다.
주식이나 펀드, 재테크는 안 했나.
안 했다. 왜 안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경제 공부는 언제 시작했나.
작정하고 시작한 게 아니다. 음반 마니아가 음반을 모으듯이 나는 책과 논문, 자료를 수집했다. 500GB(기가바이트)짜리 외장 하드에 자료가 꽉 차 있다. 데스크톱(80GB), 노트북(40GB)에도 자료가 있는데 검찰이 압수해간 뒤 돌려주지 않았다. 복구가 안 되면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경제에 관심을 둔 결정적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3학년 때 IMF(외환 위기)가 터졌다. 친한 친구의 부모가 자살했다.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보증 선 게 문제가 되어서…. 민감한 부분이라 더 얘기하지 않겠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그때 어떤 각인 효과가 생긴 것 같다.
대학 전공은 왜 정보통신을 선택했나.
나는 원래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글을 쓴 건 2008년 3월부터인가.
직장 다닐 때는 시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댓글을 다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다음 아고라의 툴과 콘텐츠가 좋다고 해서 그리로 갔다. 그런데 2008년 상황이 1997년 IMF 때와 유사해 보이더라. 거기에 견주어서 쓰기 시작했다.
많게는 하루에 10편도 쓰지 않았나.
사람들에게 이메일(질문)이 왔다. 그걸 확인하다가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다보니 점점 늘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욕설, 비방도 많아지고.
당신의 예측 중에 틀린 것도 많다. 가령 ‘부동산 반토막, 주식 500 폭락’ 같은 주장.
내가 한 게 아니다. <신동아> 가짜 미네르바의 기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누군가의 질문에 짧은 댓글로 ‘1차 저점 870, 2차 저점 550’ 이렇게 쓴 적이 있는데 그걸 짜깁기했는지도 모른다. 부동산 반토막은 언급 자체가 없었다.
조선일보는 “미네르바가 영국계 은행 HSBC를 중국계 은행으로 오해해 엉뚱한 글을 썼다”라고 지적했는데.
그 글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그걸 누가 미네르바 글 모음에 포함시켰고 이를 <신동아> 가짜 미네르바가 ‘착각했다’라고 사과하는 웃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당신의 ‘리먼브러더스 파산’ 예측도 전문가 사이에서는 이미 떠돌던 얘기였다.
알면서 왜 얘기하지 않았나.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해야 한다고 왜 박수쳤나. 공익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다.
지난해 7월 ‘물가 대폭락’설을 제기하면서 독일 사례를 들었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나.
독일은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집집마다 지하실에 1년치 이상 식량을 보관한다. 중학교 때 여자 교생 선생님이 해주신 얘기다(웃음).
외국어 실력은 어떤가.
잘 못한다. 하지만 (경제)차트 볼 실력은 된다. 중요한 건 정보를, 개인의 논점에 따라 수치가 갖는 파급력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자신을 ‘극사실주의자’라고 말하는 까닭은.
나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한층 더 파고들어 핵심과 본질적 가치를 알고자 한다.
촛불집회에 나가본 적 있나.
없다. 실시간 인터넷 생중계로 봤다. 참석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없다. 다만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주장에는 동의하나.
그렇다. 촛불시위나 용산 참사 관계했던 분들이 구치소에 많이 들어왔다. 나는 단체에는 관심 없고 개인 차원에서 그들을 찾아뵙고 싶다.
사람들은 아직도 묻는다. ‘너 미네르바 맞니?’
가짜라면 경찰에 체포되고 100일 넘게 교도소에 갇혀 있고 지금처럼 항소 준비하겠나.
앞으로 글쓰기가 부담 되겠다.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생각 중이다. 미네르바로 계속 쓰거나, 실명으로 쓰거나, 아니면 새로운 닉네임으로 쓰거나. 어느 정도 제약은 있겠지만 내가 무슨 ‘~주의’(이념)로 글을 써온 게 아니기 때문에 욕설과 비방을 제외하고는 부담 될 게 없다. 사실에 입각해 논리적으로 쓰는 패턴은 그대로 견지할 것이다.
대학에 편입해 경제학을 공부할 생각은 없나.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있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
앞으로 생계 문제는.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재판(항소심)해야 하니까. 과거는 지나간 시점이다.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지금 단계, 그 자체가 중요하다.
(<시사IN>과 인터뷰를 끝낸 뒤부터 박씨는 휴식에 들어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감기약 먹고 식사도 거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그의 지인이 전했다.)
* 여전히 올리는 글마다 Cntl-V로 따붙이기 하는 과정의 문제인지 ‘행간’, ‘줄’이 엉망으로 편집되어 올라가는 군요. (‘구글 크롬’을 썼는데도) 위의 카페에서는 제대로 붙여진 글을 봅니다. 보시기에 화면 자체가 번거로우신 분들은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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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포털 다음의 토론공간인 "아고라 경제방"에 게시됐던 글입니다. 다음측에서 일방적으로 글을 차단조치하였기에 부득이하게 이곳에 복구해 두었습니다. 원래 게시됐던 글에 달렸던 댓글은 이곳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