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2/24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은 사람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니까 진실이라고 말하면서도 거짓을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거짓을 진실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 영혼의 아주 나약한 구석을 말하는 듯하다. ‘라이프니츠’의 글 하나가 떠오른다.
“한 마리 곤충이 천 조각으로 나누어지면, 그 영혼은 ‘여전히 살아 있는 어떤 부분 안에 남아 있는데, 언제나 이 부분은 곤충을 찢는 자의 행동을 피하기 위해서 곤충이 웅크릴 때만큼 작다.’” (데 보스에게 보내는 편지-1706년 3월, 아르노에게 보내는 편지-1687년 4월)
박대성의 경우, 라쇼몽의 그런 나약한 점은 처음부터도 그랬던 듯하다. 그러나 초기 이후의 강한 조작은 그로 하여금 이상한 자신감을 확장시키며 불러 일으키게 만든 것 같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거짓이 새로운 형식의 거짓을 연속해서 의도적으로 재 양산한 것이다. 백지연과의 케이블TV 대담에서 그는 생필품을 일정 정도 사재기 하라고 했던 것에 대해 물으니 그저 연신 웃으면서 ‘사과한다’고 답을 했지만-그는 미네르바 글에서 나왔던 경제예측 실패를 다그치는 백지연에게 연신 사과한다는 말을 꺼냈다. 과연 그리 비굴하게 사과할 일이었던가!- 정작 자신이 뭘 사두었는가 하는 데는 치약이니 뭐니 하고 참으로 기가 막힌 답을 꺼냈다. 자신도 사재기를 했다는 말을 하는 그 얼굴에 언뜻 봐도 너무 어색한 기운은 그대로 화면에서 다 드러났다. 그건 거짓이었다.
그를 만나보았던 이들 가운데는 도무지 질문의 논점(論點)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서 어떤 사안에서건 논점이 너무 명확해서 탈이었던 미네르바 필명의 글과 이미지를 떠올린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작이 이어져온 배경에는 확실히 ‘교육’(敎育)- 실제로는 이미테이션 그레이드 업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란 게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일종의 ‘훈련’(訓練)이란 과정의 산물이었지 진정한 인문학적 가르침과도 달랐다.
박대성을 미네르바 흉내 내는 ‘곰’으로 가르친 자는 누구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등장하는 것이 ‘김승민’이란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 보면 미네르바 필명의 경제, 정치, 사회관 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여러 임기응변이다. 이른바 브로커적 처세술 같은 것 말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박대성은 이제 누구에게도 자신이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당연히 자신의 근원은 미네르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오는 공격들에 순간순간만 잘 넘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나머지는 다 조작의 기획팀에서 알아서 해준다. 그들이 원하는 행동양식과 목적은 너무 간단하다. 바로 미네르바의 정체성, 메시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모두 깨트리는 것이다. 산산조각 내는 것이라 해야 옳다.
그래서인지 엉뚱한 필명으로 글도 잘 올린다. 그런데 모두 김승민인 게 그냥 드러난다. 기술적 지표에 관한 이해부족이다. 박대성-김승민은 늘 떨어지지 않는 한 조(組)다. 그의 최근 글 가운데 한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슨 ‘놀이’? 내가 종종 게임이란 단어를 쓰니까 그것도 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가? 너무 아마추어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미네르바 놀이를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김승민
http://blog.daesan.com/2009/12/23/minerva-2-10-i-see-you
글을 가만히 한 번 보기만 해도 아직 김승민은 박대성을 보면서 이 일을 ‘놀이’ 혹은 ‘미네르바 놀이’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쑥 들어온다. 좀 치기 어린, 약간은 분열적 정신을 가진 접근법이다. ‘공부하세요. 누구냐 넌?’ 하고 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뭘? 그런 철딱서니 없는 하류의 품성을? 이를테면 아직 현상 파악이 제대로 안된 케이스이고 또 그걸 부인하기에 급급한 상태가 아닌가 싶다. 죽자 살자 그렇게 가야 하는 길이 벌써 눈 앞에 와있다. 이건 확실히 ‘존망지도’(存亡之道)라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상황인식이 없다. 겨우 그 정도의 품성인 것이다. 나는 그걸 ‘격(格)이 없다’고 표현한다. 잘 배우고 못 배우고, 돈 있고 돈 없고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배우(俳優)는 결코 그 연출된 직업을 평생토록 가지지는 않는다. 영화 한 편에서 맡은 배역이 장군이라고 해서 그가 장군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 동안은 그런 마음, 정신으로 살아야 연기는 잘 나온다. 몰입(沒入)하는 셈이다. 이게 별로 신통치 않을 때, 그 배우는 하류(下流)가 되는 것이다.
라쇼몽이 우리에게 주는 인간 본성의 행동양식에 있어서의 원천적 결함 구도는 모든 사람이 다 안고 있는 모습이다. 관건은 이것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타의적인 것으로 만들어져서 그 흉내를 낼 때, 그의 기억 속에서 시야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때로 강한 ‘조롱(嘲弄)의 대상’으로 바뀌기도 한다는 점이다. 박대성은 최근 그런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고 보여진다. 이 사회가 자기가 보기에는 아주 우스운 것이다. 자신은 이제 가짜가 아닌 진짜로 분(扮)했지만 자기 영역이 깨어질 우려가 없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더 제대로 보지도 못한 미네르바를 더욱 더 닮으려고 기를 쓴다. 그런 정체성이 종종 드러날 때가 생긴다. 그걸 누가 주입하는가?
레베카 맥키논-박대성 간의 2009.10.30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맥키논 교수: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다른 사람들, 특히 블로거들이 지적하는 무척 흥미로운 부분은 미네르바라는 필명 아래에서 여러사람이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신동아가 자신을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신동아 K라는 인물을 인터뷰하기도 했구요. 이런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승민: 그건 박대성씨 보다는 변호사 입장에서 말을 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 신동아 K에 대한 그런.. 그건 제가 ...
박대성: 아아, 왜?
김승민: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건 그 신동아 K, 신동아 K의 그 일당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생각한 거는 미네르바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금을 유치를 할려고.
이 부분이 바로 그런 밑바닥 품성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포괄적인 것이 아니다. 아주 주제와 방향이 명쾌하다. 그런데 대답은 어떻게 나왔나 자세히 보자. ‘입장’이 터져 나온 장면이다. 그런데 박대성의 “아아, 왜?” 하는 말에는 짙은 아주 진한 짜증이 물씬 묻어나 있다. 이를테면 이 정도 질문은 논점을 파악했으니 자기가 답해도 충분하고, 지금까지 외국 교수 만나서 잘 알아듣게 인터뷰 잘하고 있는데 김승민이 왜 끼어드나 하는 불만이 부지불식 간에 표출된 것이다. (솔직히 레베카-박대성 인터뷰에서 박대성의 말을 영어로 어떻게든 통역했다는 게 신기하다. 도저히 번역으로 제 뜻이 나올 수 없는 그런 ‘워딩’이었으니까.)
그는 이 시점(2009.10.30)에는 철저하게 미네르바 흉내꾼이 아닌 그와 동화되어 있다는 완벽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해버리는 단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민은 여기까지 계속 끼어들어 말을 이어간다. 두 사람이 2인 1조가 되어 ‘가짜 미네르바와 그와 그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그러면서도 활용하려 기를 쓰는 조련사’들이 빡빡하게 순간적이지만 사실은 아주 깊숙하게 갈등하는 대목이 드러난다.
이 두 사람은 아마도 ‘라쇼몽’과 같은 말 할 거리는 꽤 될 듯하다. 그렇지만 이게 좀 어렵다. 왜냐하면 라쇼몽은 증빙을 기억이라는 곳에 집중하고 있으나 우리는 어느 틈엔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인문학적 ‘언어’, 그리고 기계적인 조작, 나아가 그렇게 만들어진 상황의 종합 판단 스테이지에 돌입해 있어서다. 처음 등장 시점에서는 이것을 역 이용했고 국민들 전부를 속였지만 이제 오히려 그 굴레를 거꾸로 더 안게 된 상태다. 빼도 박도 못할 두 개의 검증 수레바퀴가 돌아버렸다. 그런데도 이것을 스스로 다 깨기란 쉽지 않다. 착각이고 정말이지 오판이다. 발악인가? 만일 그 경우에는 이 두 사람의 정체성 자체는 살아있으나 정작 산 것, 산 목숨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난리 브루스를 춘다.
세상에는 라쇼몽인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지금 국면은 아주 철저하고 세밀한 검증들이 첩첩 이루어진다. 간단한 형식의 ‘라쇼몽’이 될 수 없는-‘라쇼몽’의 게임, 놀이 같은 장면이 적용되지 않는- 국면에 있다. 그걸 아직도 모른다면, 그건 바보들이다. 그렇게 행진을 하면 그게 바로 ‘바보들의 행진’이 되는 거다. 그 영화 속에는 그나마 순수함이라도 있지 이제 보는, 보이는 모습에는 사악(邪惡)함만 그득하다.
그(박대성)가 이 글을 읽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지금껏 봐서는 읽지 않는다고 본인이 이야기한 게 더 유력하다. 통제 받거나 스스로 통제해보려 하거나. 그러나 어쨌든 이제 세세히 읽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스스로 라쇼몽의 벽 속에 들어갔다고 착각을 더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다. 그 벽, 무너지면 거기에 깔려 자신이 죽는다. 혼자가 아니라 참 많은 이들이 그리 될 것이다. 그들이 모두 같이 죽자고 할까? 어리석은 판단이다.
* 덧글 하나;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좋으신 시간 많이 보내시길 바랍니다. 겨울이 깊어 갑니다. 모두 건강 각별히 유의하십시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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