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당당, 2009/12/30
‘어른’이란 말이 있다. 뜻은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다 자란 사람을 일컫는 집합명사”라고 풀이 된다. 신체적, 정신적, 다 자라다, 집합명사. 각각 나눠서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다.
‘스승’이란 말도 있다.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다. 가르친다는 행위가 붙는다.
뜬금없이 박대성 사건을 다루는데 왜 이 두 단어가 등장하는가 의아해하지는 말기 바란다. 지금 이 문제를 <보는 각도>에 관한 문제와 <바로 잡는 것>에 관한 시대의 동태(動態)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어 부득불 꺼낸 것이니까.
많은 이들이 그런 엇비슷한 생각들을 가지지만 박대성 사건은 지난 1년 간 우리의 이성적 판단능력을 시험해본 아주 무서운 <케이스>였다.
가짜 홍길동, 진짜 홍길동의 문제와도 다른 <조작(造作)> 이란 관점은 사건 초기 ‘민청학련’이란 아픈 단어까지 거론한 박재승 변호사의 평가로 당시 일단(一端)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러나 그 이후 조작의 물결이 거센 밀물-거의 쓰나미 급이었다- 처럼 밀려오자 모두 한 걸음 물러나 버렸다. 흔히 말하는 식으로 ‘죽자 살자 몸을 피한’ 예(例)에 속한다. 비겁(卑怯)했다. 모두.
그러나 변명거리는 있다. ‘경제’에 관해 잘 모르는 법조계 인사, 정치인들, 사회운동가들의 한계다. 사건은 눈에 보이는데 ‘경제문제는 글쎄…’, 잘 모르겠다? 공부를 깊이 안 했으니 파악이 잘 안 된다고 해버린다. 요즘은 처녀가 애를 낳아도 괜찮은 시대니까. 이 정도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만성이 되었나? 실제로 이런 비겁함이란 것은 ‘큰 비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라는 심리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게 패배주의적 발상법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큰 비를 맞는 기본은 큰 비 맞을 준비를 사전 하면 되는데 그게 없었다는 이야기 밖에는 안 되는 소리 같다. 안일했다는, 그렇게 살아온 거라는 증거다. 그래서 사회가 온당함을 추구할 수 있는 ‘안전판’이 전혀 없어진 걸 이 사건 초기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줬다. 홀딱 벗은 꼴이었다. 어느 누구 할 것도 없다.
가만히 보면 그건 그저 그런 ‘처세’(處世)였다. 좋은 이야기다. 좋은 말로 저렇게 말하지 좀 속상하게 말하면 ‘그저 눈치만 보고 산’ 케이스다. 가재미이건 넙치 식 눈 말이다. 그래서 얻는 게 있다면 정작 놓치는 게 또 뭐라고 생각하나?
그 상태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 2009년이란 시간대 속에서 과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어른’은 있었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에 있어서는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머리 속에 생각들은 녹록하지 않게 챙겨 넣어두었다 했지만 보는 것 외에는 행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행동은 양식이 다양하다. 몸만 움직이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반드시 인식이 자리해야 한다. 이진법 토론의 댓글(덧글) 하나 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민감하거나 두렵다 여기면 덧글 하나 못 달고 주저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정말이지 모두 이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들 산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이 모양이다. 그러니 문제는 어디에 있나? 따지고 보면 결국 ‘어른들’의 문제가 된다.
바로 여기서 저기 ‘어른’이란 정의가 그 반대말과 대비된다. 그것이 바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 자란’ 사람들의 행동이었던 것이니까. 그럼 ‘어른’ 필요가 없다. 다 자라서 겨우 한다는 행동양식이 바로 ‘처세’였으니까. 그럼 어른의 반대말로 돌아가야 한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다. 애들만 가득 사는 세상이 되었다. 처세 좋아하다 사회가 ‘아주 잘나’ 버렸다.
여기 한 몫을 더한다. 이 사회 나라 시대에 과연 ‘스승’이 있나 없나 하는 관점이다.
솔직히 나는 ‘잘난 스승이 없다’고 방점을 찍는다. 학계이건 종교계이건 사회 속 어디에건 간에 ‘없다’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스승은 ‘인도’(引導)라는 공식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건 반드시 행동이 따라가야만 하는 일이다. 나쁘게 인도한다? 그도 마찬가지다. 좋게 인도한다? 그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도둑을 스승으로 둔 제자도 있는 법이니까. 그럼 나쁜 ‘스승’만 우글대고 있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얘기 밖엔 안 된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고야! 그렇게 가르친다? 그네들이 스승 ‘깜’은 되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바로 번져서 이렇게 간다. 침묵(沈默)만으로도 가르치고 인도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래는 가능도 하고 말도 된다. 종교적으로는 심심상인(心心相印)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번 경우는 사뭇 다르다. 이건 사회적 현실사안에서 돌출된 구조적 메커니즘을 일찌감치 가진 것이다. 뭔 도 닦는 게 아니다. 보고 느끼면서도 팩트를 다 촘촘하게 확인하고서도 ‘설마!!’, ‘지금은…’, ‘아직은..’, ‘그래도…’ 이랬던 이들이 스승 행세하며 나온다면 그건 어린애들도 웃는다.
여기서 침묵이란, ‘언어’ 중에서는 최악의 현상인 ‘방관’(傍觀)에 해당된다.
그래서 서점에 숱하게 나온 ‘가르치고 인도하는 흉내를 내는’, 그러나 자기 삶의 행동양식은 전혀 달리하는 사람들의 책들을 보면서 나는 혼자 웃기도 했다. 그들은 스승의 자격으로 말하는 듯 하지만 정작 현실 문제에는 스승이 없는 사이비만 있다. 겨우 처세 잘 해라는, 혹은 그것 말고 다른 세상도 있지 하면서 거울을 요리 조리 비추기만 하는 ‘껍데기 지식’만 팔아먹고 있을 뿐이라고 난 생각되었다. 게 중에는 가끔은 좋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름은 일찌감치 썩은 스승들의 행진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치열(熾熱)하지 못한 시대 인식과 정신으로 어찌 스승이 되나 싶다. 냉소(冷笑)? 맞다. 내가 지금 그렇게 하는 중이다.
나이만 먹었다고 늙은이가 되었다고 대접 받길 원한다면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다.
왜냐하면 과거 어느 때에 비해 지금은 각 세대들이 가진 판단기준, 정보능력이 아주 다르다. 인터넷이 가진 위력은 그만큼 대단하다. 통제되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버린다. 그 속에서는 단순한 나이 숫자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가스통 들고 활개치는 노친네들을 젊은 세대가 어찌 보나를 유심히 보라. 마찬가지로 무슨 기득권을 자기가 영원토록 가지고 있을 것처럼 행세하며 운운 하는 자들, 그런 세력들도 정작 어떤 일 속에서는 쉽게 부숴지기 좋은 유리컵과도 같다. 너무 안일(安逸)하다.
단지 몹쓸 나이만 먹어 그냥 어른입네, 스승입네 하는 사람들만 꼴 사납게 더 되어 버렸다. 그런 이들을 요즘 부르는 말이 있다. ‘제4의 종족’이라는 것이다. 겉은(타이틀은)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가진 건 개뿔도 없이 사적 이익에 대한 욕심만 그득한, 그리고 아주 비겁한 그런 <허당(虛堂)>이라는 게 밝혀져 버리는 경우다. 저 정도일까, 생각도 못한 지식인이니 혹은 지성을 운운했던 자들의 드러나는 꼴사나운 작태에 크게 실망을 해버린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저런 유형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나 고개를 갸우뚱대게 만든다. 특히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저런 형태의 행동양식, 사고패턴, 거기다가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완전히 ‘밥맛’이 된다. 나이 값 못하는 부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속말로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해!’라는 말을 아이들의 입에서 생각도 하지 않고도 툭 나오게 만들어 버린 세태다. 한 때 존경을 받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나이 먹어 그 값을 끝내 못하는 자들의 노욕(老慾)이 더 추하게 보여서였을 것이다.
<경륜(經綸)>이란 말을 귀하게 여긴 적도 있다. 그러나 박대성 사건에서 이 잣대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아예 씨알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진보니 보수니 중도니 어떤 정치적 관념 차이와 이건 완전히 다르다. 본질적으로 온당한 이성적 판단능력을 시험하는 무대였으니까. 나이와 경험이 어우러진 상태, 거기서 나온 ‘잣대’가 사실 경륜이 가지는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런데 이 또한 몇 가지 경우가 있음이 확인되어 버렸다. 사적 이익이란 게 가미되면 경륜은 사악(邪惡)하게 썩어 들어간다. 딱 그 순간, 이건 차라리 그런 자의 나이 먹었고 꼼수 부리며 경륜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브로커가 되어 있는 모습들이 마치 ‘이성적이라며 겉만 포장된 개망나니’처럼 보여버린다. 그러면서 좋은 말은 온갖 군데 다 가져다 붙인다. 요즘 유행하는 일류국가니 선진화니 잣대도 불분명한 근대화 떠들기 같은 구호 류의 정치적인 말들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걸 알고도 가만히 보고 있는 사람들, 거기 빌붙어서 살자고 덤벼들면서 고개 쳐드는 것, 그걸 좋은 처세라고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경륜, 정말 개뿔이다!!
한 사회 속에 많은 잣대들 가운데서 그나마 <어른과 스승, 경륜>이란 단어는 쉽게 무시할 수 없다고 인정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박대성 사건-다른 여러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 케이스가 많다- 에서 보여진 것은 이 사회는 그런 ‘안전판’이 하나도 없이 일단 뭔가 비틀리고 왜곡된 채 흘러가고 있다는 점, 그러므로 어른은 없고 스승은 개뿔, 경륜은 어디 시궁창에 쳐 박아둔 자들이 오히려 목소리 높이는, 슬그머니 끼어들어 ‘흥미롭다’, ‘관심 가져 보라!’, ‘그거 말고도 뭐가 있을텐데…’, ‘그 때야 그랬지’ 하는 등 비겁(卑怯)의 촉수(觸鬚)를 모두 드러내는 그런 흐름을 모조리 드러내 보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솔직한 말로 그런 사회지식, 지식사회의 모습은 내게도 저기 뱃속 언저리로부터 시작하는 구역질이 거듭 나게 만든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 그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가 볼 것이다.
과연 이 증빙되고 검증된 이야기들 속에서조차 제대로 눈 뜨고 보는 어른이 없는지, 빛과 어둠을 구분해서 가르치고 인도하고자 올곧은 잣대를 꺼내는 스승이라곤 눈 씻고도 더 이상 찾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제대로 된 맑고 올바른 경륜의 잣대를 가진 이들이 이 사회에 아예 없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판단해볼 것이다. 이 사회 나라가 진정 이대로 가는 중에 발견할만한 기본 가치는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라도 숨겨져 있는지 없는지, 드러날 것인지 아닌지. 언제 나타날 건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건지.
* 덧글 하나; 금칙어로 인해 아고라에 게시하지 못했던 글들의 링크입니다.
- 연재 제 54 회 ‘딱 한 달만 주시지요! - 동아일보사에 말한다’
http://cafe.daum.net/ekfkrqkdzkvp/7iPK/33
- 연재 제 64 회 검찰에 말한다; <검찰 미네르바>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http://cafe.daum.net/ekfkrqkdzkvp/7iPK/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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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포털 다음의 토론공간인 "아고라 경제방"에 게시됐던 글입니다. 다음측에서 일방적으로 글을 차단조치하였기에 부득이하게 이곳에 복구해 두었습니다. 원래 게시됐던 글에 달렸던 댓글은 이곳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